침이 고인다
김애란 (2007)
몇 번의 알람이 울렸다 꺼지고, 고단하고 일상적인 나날들이 지나갔다. 후배는 여전히 목소리가 좋았지만, 예전만큼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에게 '습관'이란 게 생겨버린 탓일 수도 있었다. 일상의 습관, 관계의 습관, 그 습관을 예상하는 습관까지 말이다. 그것은 그녀가 퇴근 후 현관문 앞에 서서 '지금 저 안에 후배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던, 그 즈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점점 후배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게 됐다. 후배의 습관, 주로 부정적인 목록을 발견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녀는 어느새 주인공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자처럼, 후배가 저지르는 작은 실수들을 숨죽여 기다리게 되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그렇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느 순간 '거봐, 그럴 줄 알았다니까' 하고 후배의 잘못에 환호했다.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후배는 변기 뚜껑을 잘 적신다. 후배는 화장품을 헤프게 쓴다. 후배는 드라이할 옷을 세탁기에 집어넣는다. 후배는 이불 위에서 첨삭을 하고, 잉크를 묻혀놓는다. 후배는 문을 세게 닫는다. 후배는 연예 기사를 너무 많이 본다. 후배는 통화할 때 말이 많고, 후배는 한 번 쓴 수건은 다시 쓰지 않는다. 후배는 옷을 유치하게 입는다. 후배는 옷을 유치하게 입는데, 가끔 내 감각을 나무란다. 후배는 샤워 후, 발에 물기를 완전히 닦지 않고 이불 위로 올라온다. 그녀는 곧 후배의 그런 행동들이 싫어졌다. 처음에는 몇 번 농담으로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때마다 후배는 몰랐다는 듯, 실수를 인정하며 수줍어했다. 그러나 그 다음 번에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녀는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지적해 주는데도, 어떻게 그것을 번번이 잊어버릴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물론 후배에게도 선배의 못마땅한 점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후배는 물을 너무 조금 마시는 것 같다. 후배는 젓가락을 이상하게 쥐는 것 같다. 후배는 발가락에 투박한 옹이가 있는데 그 모습을 자꾸 보니 싫어진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후배의 얼굴은 너무 번들거린다. 후배는 야채를 잘 안 먹는다. 후배는 자꾸만 진밥이 더 맛있다고 그런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후배는 이상한 것 같다. 물도 조금 마시고, 야채도 잘 안 먹고, 발가락에 옹이가 있기 때문일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충고하다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후배는 미안해했고, 다음번엔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후배는 목소리가 좋았지만, 그렇다고 그 많은 습관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었던 건, 후배가 자신을 따라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였다. 먼저, 옷 입는 방법에서부터 표가 났다. 후배는 그녀의 옷차림을 농담 삼곤 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녀가 입는 옷과 비슷한 것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녀도 그려러니 했다. 가끔은 '그럴 돈으로 먼저 저축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치졸한 생각도 들었다. 젊고 환한 후배가 옷에 관심이 많은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말이다. 후배는 그녀의 말투도 따라했다. 원래 말이란 주인이 없고, 오염되고, 공유되기 마련인 것이지만 후배의 입에서 자신이 즐겨 쓰는 어휘나 농담이 튀어나올 때마다 뭔가 도둑맞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후배가 종일 자신의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것도 신경 쓰였다. 자신이 많은 시간에 걸쳐 정성스럽게 '즐겨찾기'해 놓은 목록들을 너무 쉽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따로 분류해 놓은 음악, 영화, 독서, 철학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아는 체를 하는 것이 불편했다. 후배는 음악을 잘 모르는데, 후배의 미니홈피에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깔려 있는 걸 보고 무시하는 마음이 들었던 때도 있었다. 그녀는 온라인 세계에서조차 혼자 있을 공간이 없다고 느꼈다.
* 첨삭 : 글의 내용 일부를 보태거나 삭제하여 고침.
* 옹이 : '굳은 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문제>
1. 후배와의 공동생활이 어려워진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2. 밑줄 친 부분과 같은 종류의 '도둑맞은 기분'은 왜 생기는 것인지, 여러분의 생각을 발전시켜 보시오.
3. 어떤 사람을 모방하고자 하는 심리는 왜 생기는 것인가?
4. 만약 여러분이 그녀라면 앞으로 어떻게 하겠는가?
5.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가?
* 5번 문제는 바칼로레아 철학 기출문제입니다.^^ 이 지문과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하여 넣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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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예시답안입니다. 참고하세요.
1. 후배와 함께 살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단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후배가 자신의 고유한 개성이라고 믿는 언어 습관이나 취향, 지키고 싶은 사생활의 영역까지 침범하게 되면서 그녀에 대한 호의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2. 한 개인의 역사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장시간의 생각과 시행착오를 거듭한 결과,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우리는 그것을 '나다운'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런데 타인이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모방한다면 도둑맞은 기분이 들 수 있다. 더욱이 그것이 획기적인 생각이거나 시나 소설처럼 창의적인 작품이거나 혹은 흉내낼 수 없는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10년에 걸쳐 이뤄낸 노고를 10분만에 훔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되고 싶어한다. 누군가를 닮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가도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무언가를 갖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근원적인 욕망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주인공이 후배에게 느끼는 감정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나눠써야 하는 기분 아니었을까? 주인공은 자신에게 소유권이 있으므로 사용권도 역시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3.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말투나 생각을 따라하게 된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와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자아가 다듬어지지 않은 시기에는 여러 사람을 역할 모델로 삼아 모방하게 된다. 타인을 통해서 차차 나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누가 나를 닮고 싶어한다면 그것 만한 영광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내가 모방해도 될 만큼,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일이다. 더욱이 그 사람이 나를 따라한다고 해서 나의 고유한 측면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두려워하거나 기분나빠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4. 나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스스로도 좋아하는 편이다. 따라서 후배가 내 컴퓨터의 음악을 듣거나 다운받아 놓은 영화를 보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 그것을 사용하기 전에 한 마디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나도 기분좋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줄 수 있다. 주인공이 후배를 싫어하게 된 것은 후배의 방식이 '일방통행' 식이고, 실수를 습관적으로 반복하기 때문에 못 미더워진 탓이다. 나라면 내가 허용할 수 있는 것과 허용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하여 처음부터 솔직하고, 단호하게 이야기하겠다. 그리하여 후배가 나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하겠다.
또한 내가 주인공이라면 후배가 자신의 취향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할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자신의 취향을 파악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좀 더 넉넉한 시선으로 후배를 보고, 후배의 변화를 기다려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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