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박민규 (2005)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셔야겠지만,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승객들은 모두 전철을 타야 하고, 전철엔 이미 탈 자리가 없다. 타지 않으면, 늦는다. 신체의 안전선은 이곳이지만, 삶의 안전선은 전철 속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곳을 택하겠는가.
처음 열차가 들어오던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열차라기보다는, 공포스러울 정도의 거대한 동물이 파아, 하아, 플랫폼에 기어와 마치 구토물을 쏟아내듯 옆구리를 찢고 사람들을 토해냈다. 아아,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뭔가 댐 같은 것이 무너지는 광경이었고, 눈과 귀와 코를 통해 머릿속 가득 구토물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야! 코치 형이 고함을 질러주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도 놈의 먹이가 되었을 테지. 정신이 들고 보니, 놈의 옆구리가 흥건히 고여있던 구토물을 다시금 빨아들이고 있었다. 발전(發電)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힘! 그때 코치 형이 고함을 질렀다. 해서, 엉겁결에 - 영차, 영차 무언가 물컹하거나 무언가 딱딱한 것들을 마구마구 밀어넣긴 했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어찌 내 입으로 그것이 인류(人類)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신 차려. 열차가 출발하자 코치 형이 다가와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네. 심호흡을 크게 했지만 다리가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가) 저 사람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 화물이나 뭐 그런 걸로 생각하란 말이야. 알겠니? 알겠지?, 에서 다시 열차가 들어왔으므로, 나는 새로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파아, 하아. 의정부행이었던 두 번째 열차는, 아마도 두 배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이건 마치, 전 인류가 아닌가.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안전선 밖의, 그러니까 <물러서주시기 바랍니다> 정도의 지점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 세 개의 넥타이핀과 두 개의 단추, 더불어 부러진 안경다리가 부상병의 목발처럼 뒹굴고 있었다. 뿔테였다. 인류의 분실물들을 수거하며, 나는 비로소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중략 -
일주일이 그런 식으로 지나갔다. 아침이면 전 인류의 참상을 목격하고, 오전의 짧은 잠, 이어지는 주유소 알바와 밤의 편의점. 온종일 머리 어깨 무릎 발이 아프더니, 다음 날엔 머리 어깨 발 무릎 발 머리 어깨 무릎 귀 코 귀까지가 아프다고 할 정도로, 온몸이 아파왔다. 이건... 시간당 삼만 원은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다시 불만에 사로잡혔지만, 지금 관두면 억울하지 않니? 코치 형의 코치도 과연 옳은 말이다 싶어 이를 악물고 출근을 계속했다. 어쩌면 피라미드의 건설 비결도 <억울함>이었는지 모른다. 지금 관두면 너무 억울해. 아마도 (나) 노예들의 산수란, 보다 그런 것이었겠지.
* 발전(發電) : 전기를 일으킴.
* 인류(人類) : 세계의 모든 사람.
* 산수 = 수학.
<문제>
1. 주인공은 전철 역에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2. 승객들의 모습을 사물에 비유하고 있는 단어나 문구를 본문에서 찾아 쓰시오.
3. (가)처럼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4. (나)에서 '노예의 산수'란 어떤 의미인지 자유롭게 해석해 보시오.
5. 본문에서처럼 억울함도 우리가 어떤 일을 지속해야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각자를 움직이는 동력(힘)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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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예시답안입니다. 참고하세요.
1. 승객이 몰리는 아침 저녁의 출퇴근 시간, 더 많은 승객을 지하철에 탑승시키기 위해 뒤에서 밀어주는 도우미 역할을 한다.
2. 구토물, 댐, 무언가 물컹하거나 무언가 딱딱한 것들, 화물.
3. 주인공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지하철 안으로 밀어넣는 역할이다. 승객과의 신체적 접촉이 불가피한데, 간혹 이를 불쾌하게 여길 승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에 신경 쓰다 보면,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코치 형의 생각이다. 때문에 주저하지 말 것이며, 심지어 승객을 사물처럼 취급하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그 편이 일을 수행하기에는 훨씬 쉽기 때문이다.
4. 여기서 말하는 '노예'는 자신의 욕망이나 의지에 따라 능동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에 이끌려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그리고 '노예의 산수'라 함은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 정확히 말하면 명백한 '지혜의 부족'을 의미한다. 자신의 삶에서 당당한 주인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삶의 만족도가 낮고, 일에서 보람을 느끼기도 어렵다. 그리고 언제나 상황의 노예가 되어 자신이 내린 판단을 합리화하곤 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동안의 수고가 아까워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주인공처럼 '노예'들은 먼 미래까지 고려한, 최선의 선택을 하지는 못한다. 이들의 인식은 기껏해야 현실이라는 좁고 답답한 울타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5. 나를 움직이는 동력은 '즐거움'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럴 듯하거나 명예가 주어지거나 혹은 보상이 주어지는 일들은 이상하게 별로 즐겁지 않다.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즐거우면 주저하지 않고, 시도해보는 것이 나의 성향이다. 좋아하는 일일수록 시작도 빠르고, 실력도 급성장한다. 예를 들어 나는 음악이 좋아서 독학으로 베이스 기타를 배웠고, 오디션을 통해 밴드 생활도 1년 넘게 경험했다. 지금은 공부를 위해 밴드를 떠났지만 후회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1년 동안 실컷 해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마음이 즐거울 때 최고의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좋은 결과는 그것을 꼭 해내야 겠다는 비장한 각오에서 나온다기보다는 마음이 즐거운 가운데 우연히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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